“닥터 리, 당신은 현장서 만난 4·19혁명의 상징”

 

《“닥터 리, 난 글렌 페이지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오, 페이지….” 50년 만에 처음 이뤄진 대화였다. 수화기를 거머쥔 글렌 페이지 하와이대 명예교수(81)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목소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 수화기 너머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 살고 있는 이회백 씨(76·사진)도 말을 잇지 못했다.》


페이지 교수, 시위중 총상 이회백 씨와 50년 만에 통화

병원서 만났던 서울대생과 본보 수소문으로 극적 연결
“목격담 책에 당신 얘기 쓸것” “기억해줘서 감사할 뿐”

○ 4·19혁명 속의 짧지만 깊은 우정



50년 전인 1960년 4월 19일 페이지 교수는 4·19혁명의 현장에 있었다. 6·25 참전 용사인 그는 1959년 미국 미네소타대가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파견한 연구고문 교수를 자원했다. 6·25전쟁 연구의 고전 ‘코리안 디시전(The Korean Decision)’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였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 그는 1960년 4월 18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고려대 학생 시위를 구경하고, 19일에는 서울대 학생 시위대를 아침부터 종일 따라다녔다.

미국인들은 거리로 나가지 말라는 대사관의 조언이 있었지만 듣지 못했다고 한다. 골목에 숨어 경무대 앞 총격 현장도 목격했다. 페이지 교수는 “학생들이 접근해 오자 지휘관이 실탄을 장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자리를 떠나려는데 칼빈 자동 소총이 선도 사격을 하며 30발들이 탄창을 연발로 다 쏘아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발 사격이 끝날 무렵 1개 소대의 경찰 병력이 소총으로 치명적인 일제사격을 했다”고 당시를 구체적으로 회상했다.

이 씨는 이때 부상했다. 총탄이 이 씨의 오른쪽 무릎을 관통했다. 서울대병원으로 실려간 이 씨는 닷새가 지난 4월 24일 서울대병원을 찾은 페이지 교수를 만났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힘은 자유입니다. 자유 없이는 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세대는 이를 해낼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해야 합니다.”

이 씨는 왜 시위에 나섰는지를 묻는 페이지 교수에게 단호한 어조로 이같이 말했다. 페이지 교수는 이날 이 씨와 짧지만 깊은 우정을 나눴다.

○ “당신의 얘기를 책에 담고 싶어요”



4·19혁명 당시 인연을 맺었던 글렌 페이지 미국 하와이대 명예교수와 이회백 씨가 50년 만에 ‘전화 상봉’을 했다. 페이지 교수는 14일 서울에서 열린 4·19 민주혁명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면서 “당시 병원에서 만나 인터뷰한 서울대 의대생을 찾고 싶다”고 요청했고 동아일보가 서울대 동창회 등을 통해 이회백 씨를 찾아냈다. 17일 페이지 교수가 숙소인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미국 시애틀에 있는 이 씨와 통화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14일 열린 ‘제50주년 4·19민주혁명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발표자로 참가한 페이지 교수는 방한 전 대회 주최 측에 자신이 4·19혁명 당시 병원에서 처음 만난 서울대 의대생을 찾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동아일보는 서울대 동창회 등을 통해 이 씨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찾아냈다. 이 씨는 미국에 있었다. 페이지 교수는 17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자신의 방에서 기자의 주선으로 이 씨와 통화를 했다.

“총상 입은 다리는 다 나았나요?” “그럼요. 지금은 완전히 나았죠. 당시 몇 달 정도 병원에 있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의사가 돼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2004년 은퇴했죠.”

“당신은 자유와,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위해 싸웠던 매우 용기 있고 영웅적인 학생이었어요. 만약 당신이 동의한다면 책으로 펴내려는 4·19혁명 목격담에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저를 기억해 주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페이지 교수와 이 씨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30분가량 환담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전화를 끊었다.

○ “이 씨는 나에게 4·19혁명의 상징”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자 조재미 계엄군 사단장(가운데 군복 입고 두 손을 치켜든 사람)이 중앙청 앞에서 지프에 올라 시위대와 함께 이 대통령의 하야를 환영하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박용윤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가 촬영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페이지 교수는 ‘비살생 정치학’을 주창한 유명 정치학자다. 페이지 교수는 “비폭력적인 대학생들의 연대로 추진된 4·19혁명은 10여 년 뒤 나의 학문적 관심이 ‘비살생 정치학’으로 옮겨가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며 “이 씨는 내가 4·19혁명에서 개인적으로 만난 유일한 사람으로 4·19혁명의 상징이었다”고 말했다.

페이지 교수가 이 씨와 1960년 4월 24일 서울대병원에서 인터뷰한 내용은 A4용지 6쪽 분량으로 당시 미국대사관이 입수해 4월 26일 미 국무부로 전송했다. 성신여대 사학과 홍석률 교수가 발견해 이번에 번역한 문서 중 하나다. 페이지 교수는 미국대사관이 이 씨와 자신의 인터뷰를 입수한 경위에 대해 “나와 친구였던 UPI특파원이 전한 게 아니었을까 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미국대사관 문서에 기록된 이 인터뷰에서 “일부 시위대는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나와 동료들은 ‘민주주의를 지켜 공산주의를 물리치자’ ‘평화 시위를 총칼로 방해하지 말라’고 외치며 반정부 구호를 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했다.

홍 교수는 “이는 시간이 지난 뒤의 구술이 아니라 혁명이 진행되던 상황에서의 생생한 기록”이라며 “4·19혁명 시위 초기에 시위대의 인식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